Unterwegs zur Theologie








화이트헤드의 진리와 아름다움 이해
Alfred North 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전 철



제17장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란 경험의 계기 속에서 여러 요인들 사이의 상호 적응을 말한다. 그래서 원초적 의미의 아름다움은 현실적 계기들에서 예증된 성질이다. 이 아름다움을 향한 목표는 이중적이다. 첫째 다양한 파악 간에 상호 억제가 없다는 것이다. 주체적 형식의 여러 강도가 상호 억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둘째, 다양한 파악을 하나로 종합하는 결합이 객체적 내용과, 객체적 내용의 새로운 대비를 도입한다. 실로 '아름다움'의 완전성은 '조화'의 완전성으로 정의되며, '조화'의 완전성은 세부에 있어서 그리고 최종적인 종합에 있어서 '주체적 형식'의 완전성으로 정의된다.

아름다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우주 내에서 완전한 실재적 사물인 현실적 계기에 실현되는 '아름다움'이다. 둘째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이상이다. 오히려 후자는 전자의 측면인 아름다움을 파악하면서, 있는 계기에 의한 자발성의 다행스러운 행사와 더불어, 다른 여건과의 다행스런 연합에 의해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주체적 형식의 완전성을 기반으로 한다. 이 주체적 형식의 '완전성'이란, 서로 억제하기 때문에 그것에 적합한 힘에 이르지 않게 되는 구성요소로서의 느낌이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억제'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완전한 억제이다. 완전한 억제는 주체적 형식의 유한성의 한 예이다. 이러한 완전히 억제된 구성요소로서의 주체적 느낌이라는 것은 본시 그 주체적 형식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조건들 밑에서 구성요소일 수 있었다는데 지나지 않는다. 둘째는 주체적 느낌의 억제이다. 주체적 지향이 단일하게 통합되지 않고 상이한 지향이 공존할 때 제3의 느낌은 출현한다. 이것은 통일성이 상실된 미적인 파괴를 창출한다. 이러한 것은 바로 '부조화의 느낌'이다. 부조화의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완전성으로부터 더 후퇴하게 된다.

완전성 또한 고차원의 완전성과 저차원의 완전성이 있다. 그리고 보다 고차원의 유형을 지향하는 불완전성은 보다 저차원의 완전성보다 상위에 있다. 자유의 사회적 가치는 그것이 갖가지 대립을 산출하는 데에 있다. 일체의 실현은 유한적이며, 따라서 무한한 모든 완전성이라는 것과 같은 완전성은 없다. 다양한 유형의 완전성은 그 자신들 간에 서로 대립하고 있다. 그래서 부조화가 아름다움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완전성의 단조로움부터 신선한 이상으로 수행하게 하는 점이다. 부조화의 가치는 불완전성의 이점에 기여한다.

특히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고찰은 부조화의 가치를 예증한다. 이 민족은 완전성의 위대한 이상을 통해서 진보에 눈뜨게 되었다. 이러한 전진을 통하여 완전성은 성취되었다. 그런데, 영감은 고갈된다. 신선도는 사라져간다. 이제 학식과 세련된 취미가 모험의 열기를 대체하였다. 부조화의 가치는 완전성을 지향케 한다. 하지만 완전성의 왕국에 안주하는 문명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창출되지 않는다. 완전성은 있지만 더 이상 새로움은 없다. 문명을 그 최초의 강력한 열정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식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모험, 즉 새로운 완전성에 대한 추구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자발성, 즉 결단의 독창성은 각각의 현실적 계기의 본질에 속한다. 그것은 개체성의 최상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정한 단계의 완전성을 달성한 후에 열정을 보존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먼저 요구되는 것은, 달성된 완전성의 유형에 부조화를 끌어들이지 않는 모든 변주를 탐색하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악의 혼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이상학적 원리의 결합작용에서 발생한다. (1) 일체의 현실화는 유한하다는 것 (2) 유한성이 양자택일적 가능성의 제거를 포함한다는 것 (3) 물리적 실현의 완결성으로부터 제외된, 당면 문제와 관계가 있는 선택지에 순응하는 주체적 형식을 정신적 기능이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현상(Appearance)은 다양한 객체를 통일함으로써 중후함과 강도를 결합시킨다. 그것은 객체를 단순화하며, 그런 단순화의 선상에서 주어진 세계의 질적 내용을 부가한다. 그것은 선이건 악이건 간에 생생한 정감적 색조의 경험을 이끌어내는 대신에 강도와 중후함을 보존한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극치와 '악'의 극치를 가능케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양자를 단조로운 제거 내지 단조로운 체감으로부터 구출해주기 때문이다.

특수한 개체성의 정서적 가치가 단순한 감각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정서의 일반화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일반화된 정서적 성질은 사랑, 존경, 섬세한 느낌, 가치감, 증오, 공포, 자신의 존재와 얽혀 있는 특정한 객체와의 연합에 대한 일반적 느낌을 말한다. 영혼의 생명에 있어 계기에 이어지는 계기의 연속적 내재성은, 그 생명의 현재의 계기에 있어 어떤 특정한 객체의 연속적 파악의 누적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그 다양한 파악에 이어 새로운 성질이 우월성을 확보하게 되며, 원초적 성질은 다소의 차이를 보이면서 현존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양하고 계속 변동하고 있는, 보다 특수한 유형의 성질은 최종적 파악의 색조에 있어 순응적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제외되어 간다.

제18장 진리와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최대한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 경험의 다양한 사항들이 상호간에 내적으로 순응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실재'의 다양한 구성요소의 관계와 '현상'의 다양한 구성요소의 내적 관계 및 '현상'과 '실재' 간의 관계에 관여한다. 그러기에 어떠한 경험의 부분도 아름다울 수 있게 된다.

'진리'는 두 측면에서 보다 좁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 진리는 현상과 실재와의 관계이다. 둘째로, 진리의 경우에 있어 '순응'의 관념은 '아름다움'의 경우보다 좁다. 왜냐하면 진리관계는 두 개의 관계항이 어떤 요인을 공유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증진시키기 위한 '진리'의 일반적 중요성은 압도적이다. 결국 진리관계는 여전히 '조화'를실현하는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방식이다. '아름다움'에 봉사하는 '진리'의 기능을 통하여 '진리' 실현은 그 자신에 있어 느낌의 '아름다움'을 증진하는 요소가 된다.

멀리 떨어진 이상에의 지향으로 정당화되는 변화가 직접적 '현상'을 직접적 '아름다움'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예술'에 의해 증진되어야 한다는 것은, 신선함을 향한 순수한 갈망의 힘에 대한 찬미이다. 문명에 봉사하는 데 있어 예술이 갖는 장점은 그 인위성과 그 유한성에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한계 내에서 그 자신의 완성을 성취하는 인간 노력의 유한한 단편을 의식에 전시한다.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유한한 창조적 노력이 인각된 자연의 단편이며, 그것은 그 막연한 배경의 무한성으로부터 세분화된 개별적 사물로써 자존(自存)하고 있다. 그래서 '예술'은 인간성 감각을 고양시킨다. 인간의 성취를 위해 준비된 유한한 완전성을 의식 속에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예술'이 필요하다.

문명의 예술은 물리적이기도 하고 순수한 상상의 산물이기도 한 많은 원천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필요한 순간에 최초로 일어나는 삶의 생기를 자유로이 향유하려는 단순한 갈망의 승화이며, 승황의 승화이기도 한 것이다. 에술이 번득이는 섬광처럼 '사물의 본성'에 관한 은밀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드러냈을 때, 그것은 인간 경험 속에서 치유적 기능을 발휘한다.

'과학'과 '예술'은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단호한 의식적 추구이다. 그것들 속에서 인류의 유한한 의식은 자연의 무한한 다산성을 그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정신의 운동에서 여러 유형의 제도와 여러 유형의 직업이 개발되어 나온다. '교회'와 '의식', 한평생을 바친 '수도원', 지식을 탐구하는 '대학', '의학', '법률', '무역'의 방책 - 이것들은 모두 문명을 향한 목적을 반영하고 있으며, 거기서 인류의 의식적 경험은 '조화'의 원천을 활용하기 위하여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1996년 12월 22일